| 명칭 | 다마쓰쿠리이나리 신사 Tamatsukuri Inari Shrine 玉造稲荷神社 |
|---|---|
| 🗺️ 소재지 | |
개요
오사카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느끼고 싶은 역사 애호가나 도심 속에서 조용히 사색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개인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다. 특히 도요토미 가문이나 성지 순례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이다.
경내의 다양한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물을 둘러보며 과거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고,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꽃과 단풍을 감상하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독특한 여우 석상들을 관찰하거나 연애 성취를 기원하는 에마를 봉납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부 방문객은 난바·다마쓰쿠리 자료관 관람을 위해 사전 예약이 필요하고 유료인 점, 또는 고슈인(참배 기념 도장)을 받을 때 다음 페이지에 잉크가 번지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아쉬움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핵심 평가
🏷️여행지 특성
주요 특징

도요토미 히데요리 관련 유적 탐방
경내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 동상과 그가 봉납했으나 한신대지진으로 손상된 토리이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어, 오사카 성과 관련된 역사를 직접 느낄 수 있다. 또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태반을 모신 호에즈카 다이묘진도 있다.

다양한 여우 석상과 고즈넉한 분위기 체험
이나리 신사의 상징인 수많은 여우 석상들이 경내 곳곳에 배치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도심에 위치하면서도 비교적 관광객이 적어 조용하고 평화롭게 참배하거나 산책하기 좋다.

계절별 아름다움과 연애 기원
봄에는 매화와 벚꽃, 여름에는 수국 등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을 감상할 수 있다. 하트 모양의 '코이키츠네(사랑 여우) 에마'에 소원을 적어 걸며 연애 성취나 부부 원만을 기원하는 이들도 많다.
추천 포토 스팟

도요토미 히데요리 공 동상 앞
늠름한 히데요리 동상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한신대지진으로 손상된 토리이
역사의 흔적을 담은 독특한 모습의 토리이를 배경으로 촬영할 수 있다.

만케이이나리 신사 주변 여우 석상들
다양한 표정과 크기의 여우 석상들이 모여 있어 인상적인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방문 팁
고슈인(참배 기념 도장)은 직인이 직접 써주는 방식이며 한 종류(300엔)이다. 유료(100엔)로 제공되는 유서 깊은 컬러 안내서도 있다.
경내 서쪽에 자갈로 된 무료 전용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오사카 성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하며, 함께 둘러보는 일정을 계획할 수 있다.
연애 성취나 부부 원만을 기원하는 하트 모양의 '코이키츠네(사랑 여우) 에마'가 인기 있다.
난바·다마쓰쿠리 자료관은 관람료 100엔이며, 1주일 전까지 예약이 필요하다.
접근 방법
🚇 지하철 이용
- JR 오사카 순환선 또는 지하철 주오선/나가호리쓰루미료쿠치선 모리노미야역 하차 후 남서쪽으로 도보 약 6분 (약 500m).
- JR 오사카 순환선 또는 지하철 나가호리쓰루미료쿠치선 다마쓰쿠리역 하차 후 북쪽으로 도보 약 6~10분.
주택가에 위치하여 입구가 다소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언급이 있다.
🚗 자가용 이용
- 신사 서편에 무료 전용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 공간은 자갈로 되어 있으며, 월정기 주차 공간은 별도로 있다.
축제 및 이벤트
새해맞이 참배 (하쓰모데)
여름 축제 (나츠마츠리)
역사적 배경
10개의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클릭하여 펼치기
주변 명소
이 장소 주변에는 표시할 명소가 없습니다.
여담
신사의 이름 '다마쓰쿠리'는 고대에 이 일대가 구슬(勾玉, 마가타마 등)을 만들던 다마쓰쿠리베(玉作部)의 거주지였다는 전승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봉납한 토리이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기초가 손상되어 현재는 상부와 각부를 나누어 경내에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경내에는 센노 리큐가 사용했다는 우물에 착안하여 2006년에 만든 '리큐 우물'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한때 오사카 33관음 성지 순례 제10번 성지로 관음당이 있었으나, 메이지 정부의 신불분리령으로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는 언급이 있다.
만화가이자 작가인 아키타 미노루가 어린 시절 이곳 경내에서 자주 놀았다고 하며, 그의 '소혼비(笑魂碑)'가 세워져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사 이름이 바뀌면서 정문 앞 신사명 석비의 '玉造' 글자만 석판을 덧대 수정했다는 관찰이 있다.